♣ 할머니의 철학 ♣
오늘도 어김없이 빈 상자며 빈 병을 현관 앞에
내놓자마자 그 할머니가 다녀가십니다.
이 동네에 이사 와서 바로 오시기 시작했으니까
벌써 수년째 마주치는 할머니입니다.
처리하기 곤란한 재활용품을 치워주니 고맙다는
생각도 들지만 남루한 옷차림의 할머니에게서
지저분함이 묻어올 것 같아
아이들에게 접근조차 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.
수년째 마주치면서 인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.
빈 병, 빈 상자로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가 혹시나
다른 것을 요구할까 봐 하는 걱정이 앞서서였습니다.
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. 초인종
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그 할머니였습니다.
"무슨 일이세요?" 저는 앞뒤 상황을 알지도
못한 채 불편한 기색부터 드러냈습니다.
"이거..."
할머니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.
물끄러미 쳐다보는 나에게 할머니는 말했습니다.
"아까 가져간 상자 안에 이게 들어있더라고,
이 집 거 같아서.."
정신없이 청소하다 흘린 만원이 빈 상자 안으로
들어갔나 봅니다.
나는 고맙기도 하고 측은한 마음도 들어
할머니께 말했습니다.
"할머니 괜찮으니 그냥 쓰세요."
그러자 할머닌 먼지로 뒤덮인 손을 흔들며
"아냐 난 공짜는 싫어, 그냥 빈 상자만 팔면
충분해." 하시며 만원을 내 손에 쥐여 주며
손수레를 끌고 떠나셨습니다.
순간,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.
누구보다 깨끗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하시는
할머니에게 그간 마음으로 쏟아 부었던 온갖
생각들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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